자신의 삶에 대한 열정과 더 나은 삶을 갈망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을 우리 사회는 당연하게 여기고 그 마음과 태도를 지지한다. 그리고 그런 갈망을 성취하기 위해 열심을 다해 노력하고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격려하고 칭찬한다. 오늘 얘기하고 싶은 야곱도 이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쌍둥이 형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났다고 해서 ‘속이는 자’, 발 뒤꿈치를 잡은 자’라는 뜻을 지닌 이름을 가졌고, 그 이름처럼 남을 속여 빼앗아 오랜 세월 도망자의 삶을 살아야 했기에 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더 많다.
그러나 작은 자로 태어나나 큰 자가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뜻이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고, 그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것이 자신에게 좋은 것인지 분별하는 영리함을 지닌 사람이었다. 혈기왕성한 형 에서가 밖에서 자신의 사냥솜씨를 뽐내고 있을 때, 그는 집 안에서 엄마, 리브가를 도왔으며 그로 인해 장자의 권한이 얼마나 크고 좋은지에 대해서도 일찍 깨닫게 되었다.
어느날 배가 고파 팥죽 한 그릇을 얻어먹고 싶어 하는 형 에서에게 야곱은 자기에게 장자의 권리를 달라고 한다. 당장 배가 너무 고팠던 에서는 크게 개의치 않고 팥죽 한 그릇에 자신의 권리를 팔아버린다. 장자에게 다 가는 상속권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린 거나 다름이 없는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아무리 장자의 권리가 막대하다지만 어떻게 형의 것을 속여 가져올 수 있나 싶기도 하지만, 자신의 권리가 얼마나 크고 중한 것인지를 깨닫지 못한 에서의 어리석음에 대해 간과하기도 어려울 것 같다. 나중에 자신의 결정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알게 된 에서는 분노한다.
이후 야곱은 또 어머니 리브가의 지시에 따라 형 에서로 변장을 해 아버지 이삭에게서 장자의 축복을 받게 된다. 이는 에서를 폭발하게 만들었고, 에서는 야곱을 죽이겠다며 찾아다니게 된다.
리브가는 왜 장자인 에서를 놔두고 야곱에게 축복이 가기를 바랐던 것일까. 그 당시에는 장자에 대한 부모들의 기대나 사랑이 남달랐을 것이고, 아버지인 이삭이 에서를 사랑하는 것을 리브가가 알고 있음에도 이런 대담한 일을 행했다는 것이 놀랍다. 추측건대 어머니의 입장에서 늘 밖으로만 다니고 이방 여인들을 가까이하는 에서에 대한 불안감이 있었을 것도 같다. 그에 비해 야곱은 차분하고 영리하며 성실하게 집안일을 잘 돌보기 때문에, 가정을 잘 보존시키고 번성시킬 거라는 믿음이 야곱에게 더 있었던 것은 아닐까.
어쨌건 이런 큰 일을 치른 리브가는 야곱에게 에서가 죽이려고 드니 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을 가라고 한다. 결국 야곱은 에서를 피해 라반의 집으로 도망가게 되고, 도중 벧엘이라는 곳에 도착해 쉬게 된다. 이 때 야곱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깊은 절망감과 두려움, 그리고 엄청난 후회를 하지 않았을까? 그 장자의 축복이 뭐라고 아직 보지도 못한 축복과 권리 때문에 고향 땅과 가족을 등지고 새로운 곳으로 도망쳐야 하는가 하며 자신의 신세에 한탄하지 않았을까?
야곱의 불안과 두려움은 벧엘에서 야곱이 하나님께 한 기도에서 드러난다. 그는 그를 다시 평안히 아버지 집에 돌아가게만 해주면 하나님이 자신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자신의 것의 십 분의 일을 드리겠다고 서원한다. 야곱의 소망은 오직 다시 집으로 안전하게 돌아가 부모님과 함께 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은 야곱에게 네 자손이 수도 없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주신다. 자신의 목숨이 지나가는 도적떼나 야생 동물에게서 혹은 형에게서 빼앗길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시기에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가게 해 주겠다는 약속이 아닌 그의 자손이 수도 없게 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을 주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온 관심은 자신을 죽이러 오는 에서에게서 벗어나는 것이었고, 하나님께 이를 위해 딜을 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여기에 그와 함께 계셨던 것에 대한 두려움과 안도감을 느끼며, 자신이 베고 있던 돌에 기름을 붓고 벧엘이라 이름을 칭한다.
야곱의 이런 모습이 나를 포함한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많은 크리스천의 모습과 별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의 모습을 통해 야곱은 비열하다, 사기꾼이다 라는 비난을 많은 사람들에게 듣지만, 정작 우리도 야곱과 같지는 않더라도 자신의 욕구와 목적을 위해 크고 작게 자신과 남을 속이며 포장하고, 또 힘들 땐 하나님께 도와달라며 우리가 할 수 있는 딜을 들이밀 때가 적지 않다. 현실을 바라보는 우리는 지금의 문제가 가장 절박하다. 하지만 시간과 공간에 제약이 없으신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인생이 담기엔 너무 크고 위대하다. 그러니 셀 수 없이 많은 자손이 내게서 생긴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 당시 야곱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을까. 그가 원한 그 축복을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깊은 수렁 가운데 빠진 것 같은 그의 절망감과 고통은 그 약속에 대해 차분히 묵상할 만한 마음의 여유조차 없었을 것이다.
야곱이 삼촌의 집, 하란에 도착한다. 그는 삼촌의 둘째 딸 라헬을 보고 반해 그녀를 위해 7년을 삼촌 집에서 일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7년 후 삼촌 라반은 라헬 대신 큰 딸 레아를 야곱에게 주었고, 야곱은 라헬을 얻기 위해 다시 7년을 일하게 된다. 고향을 떠나온 지 20여 년이 지난 후 야곱은 하나님의 뜻으로 인해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정하고, 4명의 부인과 12명의 아들들과 함께 고향을 향해 떠난다. 그러나 형 에서가 무서웠던 야곱은 가족들과 가축들을 자신보다 앞에서 가게 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이 얼마나 큰 지도 알고, 에서와 겨뤄 이길 수도 없다는 것을 아는 야곱은 하나님의 뜻에만 의지해 길을 떠나긴 하지만 불안하고 두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가족을 앞세우고 자신은 맨 뒤로 빠져 스스로의 목숨을 보존하려고 했다는 건 어떤 변명으로도 통하지 못할 비열하고 야비한 행동이다. 하나님의 뜻이기에 길을 떠나지만 자신을 온전히 지켜주시리라는 확실한 믿음이 없어서 나온 행동이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오랫동안 고생을 했음에도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것을 먼저 생각하는 자기중심적인 면모가 여전히 그에게서 보이는 장면이다.
그러나 열 번이나 삼촌에게 속고, 고향을 떠나 남의 집 살이를 했던 20여 년간의 그의 광야와도 같은 시간에 대한 어떤 격려나 위로도 없이, 목숨을 담보로 한 고향 돌아가기 프로젝트에 선뜻 발걸음을 내디딘 용기는 대단하다 여겨진다. 말씀에 대한 순종뿐 아니라 고향에 돌아가기를 그만큼 열망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그의 간절함은 얍복나루에서의 하나님과의 씨름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얼마나 처절하고 간절했으면 환도뼈가 부러지는지도 모른 채 기도를 했을까. 그는 이곳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고 다시 하나님께 셀 수 없는 후손을 보게 될 거라는 약속을 받는다. 야곱의 기도는 분명 평안히 고향에 도착할 수 있고 에서에게서 목숨을 구제해 달라는 내용이었을 텐데, 이에 대한 응답은 없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약속의 말씀을 다시 받은 것이다.
그는 다음 날 에서를 만나게 되고 화해하게 된다. 야곱은 드디어 고향 땅에 돌아오게 되었다. 수십 년간 가슴을 누르고 있던 공포과 두려움이 사라졌을 뿐 아니라 그토록 밟고 싶었던 고향 땅에서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얼마나 벅차고 감격스러웠을까. 삼촌에게 속아 정당한 임금도 받지 못한 채 오랜 세월 남의 땅에서 일만 하다 돌아온 고향은 야곱에겐 남다른 의미가 있었을 것 같다.
이를 보면 기도를 할 당시에 내가 원하는 답을 얻지 못했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랜 세월이 걸렸으나 야곱은 그토록 원하던 고향으로 돌아왔고 형 에서와의 관계도 회복하게 되었지 않은가. 믿음으로 무엇이든지 구하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는 (마가복음 11:23-24) 말씀을 생각 나게 하는 장면이다.
고향에 돌아온 이후에도 야곱에겐 여러 시련이 찾아온다. 야곱이 가장 사랑했던 아내 라헬이 둘째 아들 베냐민을 낳다가 죽게 된다. 야곱은 라헬에게서 난 큰 아들 요셉을 남달리 사랑했는데, 그런 그를 형제들은 시기하고 질투했고, 그가 17세가 된 때, 그를 애굽 상인에게 판 후 그가 죽었다는 거짓 소식을 야곱에게 전한다. 그리고 야곱은 다시 만나는 날까지 13년 동안 그가 죽은 줄 알고 살게 된다. 야곱 스스로도 밝혔듯 그의 인생은 참으로 파란만장했으며 험악한 세월이었다.
누구보다 축복된 삶을 살고 싶어 했고 이를 위해 열심히도 살았던 그였지만 그의 이런 고군분투는 그의 삶을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지는 못했다. 누구보다 영리했고 성실했으며 가족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무엇이 좋고 나쁜지 분별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아는 사람이었던 야곱. 그는 또한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고 하나님의 것을 높였으며 그것에 대한 갈망이 있는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이런 야곱을 사랑하셨던 것 같다. 그래서 온전히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지 못하고, 남의 것을 뺏고 속이기도 하는 실수를 저질러 그에 대한 혹독한 대가를 치르기도 했지만, 끝내 기다리시며 하나님의 때에 그를 사용하시고 약속하신 축복을 허락하신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많은 하나님을 믿는 다른 사람처럼 그도 그냥 그 인생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싶었을 뿐이다. 탄생 전부터 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축복을 그는 알지도 못했고, 직접 그 축복에 대해 듣기는 했지만 하나님과 대면하면서도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마치 지금을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이 주어진 하나님의 축복을 깨닫지 못하고 현실을 살아가기에 필요한 축복을 달라고만 애쓰는 것처럼 말이다. 마치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스스로 모든 것을 이루려 애쓰는 것처럼 말이다. 야곱의 삶을 묵상하면 할수록 하나님에 대해 더 깊게 이해하게 되는 것 같아 그의 삶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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