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이란 타인의 입장에서 세상을 경험하는 행위를 말한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내가 겪는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공감 중에서도 다른 사람이 느끼는 것을 느끼지 않고도 그 사람이 고통 속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이해하는 경우 이를 '사회인지', '사회지능, '마음 읽기', '마음이론', 사회지능, '마음 읽기', '마음이론 '인지적 공감' 이라고 부른다고 하며, 그가 앞으로 지칭하는 공감은 이와는 다른 정서적인 공감이라고 한다. 이렇게 공감을 인지적인 요소와 정서적인 요소로 분리해 구별하여 사용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 의문이 든다. 다른 사람에게 공감한다라는 것은 그 사람의 위치로 들어가 그 입장에 서면 그처럼 생각할 수 있겠다 그런 감정을 느끼게 되겠다고 인지하고 느끼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즉 공감한다라는 말 안에는 인지적인 요소와 감정적인 요소가 공존한다는 것이다. 인지적인 요소를 뺀 공감을 공감이라 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 사람의 입장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그 사람의 감정을 느낄 수 있고, 이해 없이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을 공감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오히려 충분한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느끼는 감정은 연민이나 동정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예를 들어 친한 친구가 다리를 다쳐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그의 불편함과 고통을 내가 느낀다고 하자. 얼마나 아프고 힘들까 공감한다고 내가 말한다면, 그의 상황과 고통을 이해하고 함께 느낀다고 하는 것이며, 그의 입장에 서서 그의 눈으로 상황을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에 나의 위로와 격려가 친구에게 힘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충분한 이해 없이 어떻게 그 감정을 느끼고 공감을 하며, 감정 없는 이해만으로 어떻게 상대방에게 공감한다 말할 수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공감을 이처럼 두 가지로 쪼개어 생각하는 것도 말이 안 되고 각각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 공감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고 있다 여겨지지도 않아 공감에 대한 저자의 의견에 얼마나 내가 수긍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저자는 공감이 우리에게 주는 이로움이 있음을 설명한다. 공감은 다른 사람들에게 더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더 노력하도록 우리를 자극하며,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는데 이용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감만이 도덕적인 원천은 아니며 염려나 연민으로 인해 도덕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도 많음을 지적한다. 어떤 경우에는 공감에 바탕을 둔 염려가 다른 종류의 도덕적인 염려와 충돌하기도 한다. 저자는 이에 대한 예로 세미나에서 사용되는 자료가 과거에 트라우마를 겪은 적이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교수가 학생에게 미리 알려주어 해당 학생들이 그 시간에 결석할 기회를 주어야 하는지에 대한 학계의 격론을 들고 있다. 이 경고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대개 공감에 무게를 두고 주장을 폈고, 반대하는 쪽은 특정 개개인에 대한 염려보다 학생들과 학문 정신에 대한 보편적인 염려에 기반해 논지를 폈다.
또한 공감이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어 주는 건 사실이나 빛을 비추는 면적이 좁다는 문제를 들었다. 공감은 제한적이며 자기가 관심 있는 곳에만 빛을 비춘다. 뉴타운 총기 난사 사건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구호품 등의 도움을 손길을 보내 뉴타운 공무원들이 그만 보내달라고 호소할 지경이었으나, 수단이나 방글라데시와 같은 나라에 사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처지에는 이만큼의 공감을 주는 것이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나 뉴타운 총기 난사 사건으로 인한 사람들의 관심이 공감으로 인한 것이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도움을 보낸 대다수의 사람들의 마음은 공감이라기 보다는 동정, 연민, 선한 의도가 더 크지 않았을까. 공감이 빛을 비추는 면적이 좁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그만큼 공감을 하기까지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면적이 좁은만큼 그 영향력은 크고 깊을 수 있다.
또다른 공감의 부정적인 요소로 저자는 공감은 특정 개개인에게는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통계상의 결과에는 둔감하다고 말한다. 당장 예방접종을 중단하면 10여 명의 아이들이 죽는다는 소식보다 단 하나의 아이게 결함이 있는 백신 접종으로 심각한 질병에 걸리고 그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과 가족의 고통에 대해 듣는 것이 공감을 하기에 더 쉽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공감을 하기 위해서는 이해가 필요한다. 어떤 경로로 질병에 걸리고 어떤 상황에 처했으며 어떤 대안이 있는지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에 대한 이해가 수반되어야 하며 그 이해도에 의해 상대방이 그 문제로 얼마나 고통받을지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통계상의 결과로만 공감을 하기에는 정보가 부족하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문제에 다 공감해야만 하는 것인가. 소수의 개인에게 공감하지 않는다고 많은 사람의 아픔에 더 신경을 쓰게 될까. 특정 개개인의 아픔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우리가 통계적인 결과에 대해 반기를 드는 것도 아닌데 이것이 어떻게 공감의 부정적인 요소가 되는지 잘 모르겠다.
세번째로 저자는 공감 능력이 높은 사람이 타인의 고통에 지나치게 동화될 위험이 있다고 한다. 타인의 고통에 지나치게 동화되면 장기적으로 그를 도울 수가 없다. 훌륭한 부모라면 지금 당장 아이의 마음을 상하게 하더라도 아이에게 옳은 길에서 벗어난 행동을 제지하고 바른 행동을 하도록 지도한다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지나치게가 들어가면 부정적인 결과로 가는 것 같다. 공감 또한 지나치게 그 입장만 생각하고 그 감정에만 충실할 경우에는 오히려 결과적으로 상대방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행동을 할 확률이 높다. 상대방의 고통에 공감하긴 하지만 그 고통은 상대방의 것이기 때문에 공감하는 사람은 고통의 당사자보다 더 객관적으로 고통을 바라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공감하되 지나치지만 않는다면 충분히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본다.
이 외에도 저자는 공감능력과 선행이 상관관계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고, 공감능력의 부족과 타인에 대한 공격성 및 잔인성의 상관관계를 보여주는 증거를 찾아보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들을 찾을 수 없다. 다음 장들에서 나오길 바란다.
이기적인 생각을 무시하고 타인을 돕도록 우리를 자극하는 것은 무엇일까에 대해 애덤 스미스는 처음엔 공감을 떠올렸으나, 그보다는 숙고와 옳은 일을 하고자 하는 욕구가 결합할 때 돕는 행위가 나타난다고 보았다. 숙고를 하는 동안 공감이 생길 수도 안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생겼을 때 돕는 행동을 하는 확률이 더 높아지는 건 사실이다. 또한 남을 돕기 위해서 공감이 존재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공감을 하면 돕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지만, 돕기 위해서 공감을 하려고 애쓰는 것은 아니다. 특별한 도움을 주려하기보다 어려움을 이해하고 아픔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이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저자는 공감의 이로운 점에 대해 인정하지만 공감 이외에도 이를 대체할 대안들이 많은데 굳이 공감을 강조할 필요가 있을까 질문한다. 물론 연민, 동정, 이성적 추론 능력 등도 한계가 있으나 이는 이를 사용하는 이들의 서툰 실력으로 인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공감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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