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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독서) 고통의 문제 (The problem of pain by C.S. Lewis): 1-5장

 

 

1

 

고통의 문제에 들어가기 전 저자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그의 생각을 정리한다. 그가 무신론자였던 시절 그는 모든 생물들은 고통을 일어키며 태어나 고통을 가하며 살다가 대부분 고통 속에 죽으며, 인간의 문명이 고통을 줄여주기 보다 고통을 가중시키는 면이 크고, 우주 어디에 생겨난 종족이라도 결국은 쇠락하고 파멸하며 이 우주 자체도 언젠가는 쇠락하고 말기에, 우주의 배후에는 어떤 영도 존재하지 않거나 선과 악에 무관심한 영이 존재하거나 악한 영이 존재하는 셋 중에 하나라고 믿었다. 그러나 오랜 시절부터 인간은 지혜롭고 선한 창조자가 이 세계를 창조했다고 믿었다는 사실이 그를 의아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무지로 인한 자연에 대한 환상이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깨졌다고 하기에는 그들은 우주의 섭리에 꽤나 깊이 있는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어느 시대나 상관없이 인간의 삶은 고통스러웠다. 이런 상황에서 창조자의 지혜와 선함을 유추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일이다.

 

기독교에는 누미노제의 경험(성스러운 경험), 도덕법을 인정하고 그것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함,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힘과 의무감을 불러일으키는 도덕적인 수호자를 동일시, 역사적 사건이라는 네 가지 요소가 있다. 기독교의 역사적 사건으로는 한 유대인이 스스로를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이자 도덕법을 만든 자와 동일하다고 주장한 일이다. 기독교를 받아들일지 말지 결정하기 위해 그를 헛소리를 늘어놓는 미치광이로 보거나, 자신이 주장하는 바와 일치하는 존재임을 받아들이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그의 삶의 여정을 살펴봐야 하며 그가 정말 미치광이인지 믿음을 줄 만한 인물인지 판단해야 한다. 저자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 기독교를 받아들이기로 한 것 같다.

 

또한 저자는 기독교는 우주의 기원에 대한 오랜 논쟁을 거쳐 도달한 결론이 아니라 인간의 오랜 영적 준비에 뒤이어 일어난 격변의 역사적 사건으로, 날마다 고통스러운 세상을 경험하고 있음에도 우리를 사랑하는 의로운 존재가 있음을 믿는 자들에게 고통이 문제를 안겨준다고 본다.

 

2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데 왜 인간들을 고통에서 건지지 않으시는 것인가라는 질문은 하나님을 믿는 자뿐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흔히 들을 수 있다. 이에 대해 저자는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것은 내재적으로 가능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뜻이지 내재적으로 불가능한 일도 하실 수 있다는 뜻은 아니라고 한다. 그는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지 말이 안되는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전능하시지만 자유의지를 가진 영혼들의 사회를 창조하시기 위해, 상대적으로 독립적이고 때때로 가차없는 자연을 창조하실 수밖에 없었다. 자의식과 자유를 가지기 위해선 환경과 외부 세계가 필요하며, 사회는 사회의 구성원들이 서로 만나는 공동의 장, 세상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세상에는 물질이 중립적인 장의 역할을 하고 이를 잘 수행하기 위해선 그 본질에 변함이 없어야 한다. , 물질은 변함없는 성질을 가지고 있고 일관된 법칙을 따라야 하며, 그렇기에 물질의 모든 상태가 한 영혼의 요구에만 한결같이 잘 들어 맞거나 특정 물질의 집합체에만 유리하게 작용하는 일은 일어날 수 없다. 이처럼 한 영혼에게 한결같은 만족을 주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한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한결같이 편리하고 만족스럽게 우주의 물질이 분배된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자연질서는 일상의 삶을 제한하는 한계인 동시에 그러한 삶을 가능케 해주는 유일한 조건이기도 하기 때문에 자연질서 및 자유의지와 맞물려 있는 고통을 배제하는 것은 삶 자체를 배제하는 것과 같다

 

물론 경우에 따라 하나님이 물질의 움직임을 수정하실 수 있고 때때로 수정하기도 하시시만 그런 기적과 같은 일들은 드물게 일어난다. 그렇다면 고통을 피하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행위는 적절하지 못한 것인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3

하나님의 선함은 우리의 선함과 다르지만 완전히 다르지 않다. 이는 완벽한 원과 아이가 처음 그린 바퀴 그림이 다른 것처럼 다르며, 제대로 원 그리는 법을 배우고 난 아이갸 그제야 자기가 처음부터 그리려 했던 것이 바로 그런 원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과 같고, 하나님의 선함을 경험하고 깊이 묵상함을 통해 우리는 그 차이를 알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잘못에 대해 꾸짖고 책망하신다. 그러나 꾸짖고 책망하시지만 경멸하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은 두렵고도 놀라우며 참된 의미에서 우리를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셨다는 뜻이다. ,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그를 사랑하도록 하는 것에 목적이 있다기보다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우리를 그의 사랑이 기쁘게 머물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드시려는데 있다. 그의 사랑은 작품을 향한 화가의 사랑처럼 집요하고 개를 향한 인간의 사랑처럼 전제적이며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처럼 신중하고 숭고하며 남녀의 사랑처럼 질투할 뿐 아니라 꺾일 줄 모르는 철두철미한 사랑이다(p.69). 이런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선호에 상관없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고자 한다. 이는 하나님과 같은 성품과 속성을 지니게 하기 위함이고 우리는 깨닫지 못하지만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그는 자신을 내어주셨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길 원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실현하되 자기 본성에 맞는 종류와 수준으로 실현하는 것에서 자신의 선을 발견해야 한다. 앞 장에서 생겼던 의문, 고통을 피하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적절한 것인가에 대해, 하나님과 같은 성품과 속성을 지니게 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우리가 해야 할 행위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4

하나님의 전지전능함과 선함에 비해 인간은 부족하고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완전히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기 위해 바뀌어야 할 필요가 있고 이로 인해 사랑하지만 그 대상에게 고통을 경험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이전 장에서 다뤘다. 이번 장에서는 그렇다면 왜 인간은 이렇게 부족하고 완벽하지 않으며 고통을 경험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한다. 기독교에는 이에 대한 답이 있으나 사람들이 이전처럼 기독교의 해답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되었고 저자는 이에 대해 지난 백여년 간 자비, 친절에 대한 지나친 강조로 인해 무자비함 이외의 악한 행동에 대해 사람들이 그다지 나쁘게 여기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꼽는다. 사람들은 스스로가 자비롭고 친절하다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을 위해 헌신하거나 순결, 겸손하지 않더라도 바른 인간으로 착각한다는 것이다.

 

또다른 원인으로는 정신분석학의 억압이론으로 인해 사람들이 수치심을 해로운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수치심을 느끼는 것을 통해 참된 자기 인식을 하는 것이 기독교가 추구하는 바라면, 수치심을 억압하는 것은 해로우니 솔직하게 털어놓으라며 자신의 행동에 대한 바른 인식 없이 솔직함만을 강조하는 세태는 파렴치함에 무뎌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인간의 악함을 알고 죄책감을 가지고 선한 하나님 앞으로 가 온전한 마음으로 자신의 죄를 털어놓는 것이 기독교가 바라는 바이나, 현대 사회의 그릇된 환상으로 인해 이를 어렵게 하며 저자는 이를 뒷받침하는 8가지 현상을 소개하고 있다:

1.    겉모습에 속고 있는 사회

2.    개인의 죄책감을 덮기 위해 공동의 죄책을 이용

3.    시간이 지나면 죄가 말소된다 여김

4.    사람 수가 많으면 안전감 느낌

5.    다른 시대와 문화와의 비교

6.    친절 하나로 축소되어 버린 인간의 덕

7.    도덕법의 역할 축소

8.    개인의 행동의 책임을 인간 본질로 인한 필연성으로 전가

 

5

인간의 타락에 대한 기독교의 답은 인간이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한 까닭으로 본다. 그러나 처음 인간은 선하고 완전히 행복한 존재였으나 하나님께 불순종 함으로 인해 지금의 위치에 있다는 명제에 대해, 많은 비기독교인들은 현대 과학으로 이것이 거짓임을 증명했다고 본다. 하지만 인간은 미개한 상태에서 점점 진화해 왔다는 과학적 주장이 최초의 인간들이 외설적이고 잔인하고 도덕적이지 않는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면, 그 주장은 근거없는 주장일 수밖에 없다. 선사 시대의 몇 몇 유적, 유물을 통해 지금 시대의 물건이 낫다고 판단하여 모든 면에서 지금의 사회가 우수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그 시대의 유적, 유물이 지금의 시선으로 볼 때 조잡하다고 해서 그 시대의 사람들의 지성이나 덕에 대해 판단하는 것은 위험하다. 에디슨이 만든 전화기가 현대 과학에서 보면 형편없는 단순 원리의 물건일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누구도 에디슨을 저능아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당대 최고의 발명왕이며 천재로 불리고 있지 않은가. 이처럼 과학으로는 타락의 교리를 입증할 수도 부인할 수도 없다.

 

인간의 타락은 그의 영혼의 능력에 한계가 생기도록 했고 하나님께 등으로 돌리고 스스로 우상이 되도록 했다. 지금도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지만, 고통스러운 노력을 기울여야만 가능하며 그 성향도 자기중심적이 되어버렸다. 자만, 야망, 시기, 경쟁심, 끊임없는 성공에 대한 갈망 등을 추구하는 것이 더 편하게 느껴지고, 인간의 영혼은 본성을 다스릴 힘이 약해졌을 뿐 아니라 악하게 되었고 이러한 변화는 인간의 체질이 근본적으로 변경된 사건과 다를 바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는 타락한 존재에서 출발하지만 그렇다고 원래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에 나의 잘못은 아니라 말하기 어렵다. 나의 죄성, 악함을 인정하고 그것을 변화시키도록 노력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며, 이런 우리에게 선이란 본질적으로 우리를 치료하며 바로잡아 주는 선을 의미하고, 고통은 이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