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서

(독서) 고통에 답하다 (Walking with God through Pain and Suffering by Tim Keller)

 

이제 서구 사회는 다들 세속적인 틀 속에서 살아간다. 하나님을 믿는 지극히 전통적인 신앙을 고백하는 이들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세속적인 틀에 영향을 받은 이들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고, 옳고 그름을 스스로 분별할 수 있으며, 자신이 세운 기준에 비추어 충분히 선한 삶을 살고 있다면, 하나님은 만사가 잘 돌아가도록 조절해 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학자 크리스천 스미는 이를 가리켜 도덕적, 치유적 이신론이라고 했다. (p.95)

 

나를 몸부림치게 하는 고통의 나날들 속에서 날 더욱 괴롭게 한 부분은 하나님이 왜 이 고통에서 날 건지시지 않는가였다. 내가 이정도의 고통을 겪어야만 할 정도로 잘못 살았던가에 대한 물음이 끊이지 않았다. 삶의 고통에 대한 충분한 묵상을 통해 얻었던 깨달음은 나의 행위와 상관없이 고통은 일어날 수 있으며, 그 고통을 내 삶에서 치워주시지 않는다고 내가 하나님을 원망할 수 없고, 그것이 하나님이 나에 대한 사랑을 거두신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지극히 자기 중심인 사회에서 나 또한 그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는 게 쉽지 않은 것 같다. 고통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도 여전히 내 중심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나 중심의 시선이 내 고통을 더 악화시키는 것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러던 중 알게 된 여러 권의 책 중 팀 켈러의 고통에 답하다는 고통에 대한 나의 생각에 그렇다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 반가웠다.

 

이전 시대뿐 아니라 오늘날 서구 세계 밖의 문화들에서도 고난은 삶의 이야기 속에서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대목으로, 한 인격과 영혼으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도구다. 하지만 서구 사회에서는 삶의 의미가 개인의 자유에 있다. 하지만 삶의 의미가 개인의 자유와 행복에만 있다면 고난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게 된다. (p.43)

 

한국 사회도 서구 사회와 다르지 않다. 개인의 자유와 행복이란 가치는 다른 가치보다 훨씬 더 중요해졌고 이런 양상은 교육, 미디어를 포함한 사회 전반에 걸쳐 드러난다. 고통은 대부분 극복을 통해 성공이라는 결과를 냈을 때 그 가치를 증명하는 소재로 쓰이고 성공이 빠진 고통에 대해선 관심 가지지 않는다. 이러한 사회에서 고통은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고 어떻게는 쫓아버려야 하는 극복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하게 된다. 나의 자유와 행복추구만이 내가 존재하는 이유라고 한다면, 프랭클의 말처럼 고난이 닥쳐올 때 극단적인 선택으로 갈 수밖에 없다.

 

고난이 없이는, 삶과 영혼의 온갖 실상을 자각하게 만드는 고통이 없이는 하나님을 찾게 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이 성경의 주요한 가르침이다.(p.131)

 

하나님이 악을 허용하셨다는 데 화가 날 만큼 하나님이 무한한 권능을 가지신 분임을 믿는다면, 악을 허락하고도 남을 만큼 충분한 이유를 알고 계시는 무한하신 하나님도 믿어야 한다.(p159)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포기한다면 무의미한 고난의 문제는 사라지지 않는다. 하나님이 없다면 누군가에게 부당한 시련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분노와 두려움을 느낄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하나님이나 더 높은 그분의 법이 없다면, 폭력은 대단히 자연스러운 일이 된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버리는 행위는 고난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며 시련에 맞서는데 필요한 수많은 자원을 앗아갈 뿐이다. (p.172)

 

고난을 바라보는 시각이 한없이 넓어졌음은 고난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에 대한 나의 이해도가 깊어졌음을 의미한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고난과 고통도 다루시고 계심을 믿는다는 것이며, 때론 고난이 나를 덮쳐 내 삶을 뒤흔들고 나를 헤집어놓아도 그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붙드는 것이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고난이 내게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지, 고난 속에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지 않는다. 마치 한때 승승장구하던 한 기업인이 한순간에 빚더미에 앉았을 때, 주위에 많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리는 것처럼, 평소엔 신앙심 깊은 듯 교회 활동에 열심인 크리스찬이었더라도, 고난을 겪으며 고통이 계속되고 심해지면 원망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고 부정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을 어떻게 사용하시는가? 저자는 이에 대해 네 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1.    고난은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선을 바꿔놓는다.

2.    고난은 우리 삶의 좋은 것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완전히 바꾼다.

3.    고난은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탄탄하게 한다.

4.    고난을 통과하지 않고는 고통스러운 누군가를 위로할 수 없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고린도후서 1:3-7)

 

고난을 통해 우리는 나에 대한 시선의 변화, 삶의 가치의 재발견,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사랑의 이해, 그의 통치하심과 이끄심의 방식을 깨닫게 되고, 이를 통해 나와 인간의 삶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며 다른 사람을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된다. 조지 맥도널드는 인간의 고난을 면해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고난이 주님의 고난과 같은 것이 되게 하시려고 죽기까지 하나님의 아들은 고난을 받으셨다고 말한다. 그러니 고난이 내 생애에서 없게 해달라는 기도는 얼마나 허무맹랑한 믿음에서 나오는 행위인가.

 

우리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일이 잘 돌아가지 않는 한 만족해하는 법이 없다. 뿌리가 깊지 못해서 환경 변화라는 바람 앞에서 이리 쓰러지고 저리 넘어지기 일쑤다. 그러나 대가를 바라는 조건부 신앙 구경꾼들은 죽었다 깨나도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연인이 되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껍질을 벗어버리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하나님께 순종해도 아무 소득이 없다고 느껴지는 지점까지 가야 한다. 거기가 바로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고, 순종하는 씨름이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하는 출발점이다. (p.448)

 

오랜 기간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고 순종하는 씨름을 했던 것 같다. 그 씨름이 너무 힘겨워서 믿음을 거두겠다고 선언한 것도 몇 번이다. 그러나 결국 그 씨름을 통해 어떤 조건 없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알게 됐다. 나의 삶에 닥칠 고난의 종류에 상관없이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신뢰할 수 있는 분이라는 다짐을 하게 됐다. 나의 의지와 자아를 버리고 하나님의 섭리를 온전히 받아들이게 되는 이러한 놀라운 변화는, 나를 오랫동안 고통스럽게 하는 고난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못했을 일이다.

 

저자는 고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열가지 정도로 요약한다.

1.    고난에는 다양한 면모가 있다.

2.    고난을 당하는 이들 사이에 성향의 차이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3.    울음이 필요하다.

4.    믿고 의지해야 한다.

5.    기도해야 한다

6.    생각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7.    자기 검증을 망설이지 말아야 한다.

8.    사랑의 우선순위를 재조정해야 한다.

9.    공동체를 피해선 안된다

10.  고난 가운데는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받고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다시 베풀기 위해 일종의 기술 같은 게 필요하다.